이민자, 묫자리 보러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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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샘의 <어느 베를린 달력> 중에서 무덤들이 있는 묘지 공원을 산책하는 대목이 나온다. 거기 누워있는 많은 명사들의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라이프치히에서 은둔하듯 사진 공부를 하느라 만나지 못했던 친구 언경의 작업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언경의 작업 화두 중 하나가 ‘무덤’이었다.

나는 오늘 자비니플라츠 역아래의 책방을 지나다 우연히 저 책을 보고, 바로 샀다. 두 가지 키워드를 보고, ‘베를린’, ‘묘지’ (그리고 사실 3.99유로 세일)

문득 이 땅에 내가 누울 묫자리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이민자, 묫자리 보러 다닌다>를 시작한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 행위 개념은 유대인 망명자로서의 정체성 경험과 더불어 창안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법적이고 정치적인 권리 없이 그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소속되지’ 못한 상태와, 그곳에서 일어나 는 ‘공적인 일’(자신과도 연관되어 있는 공통의 일)에 그 어떤 정치적 법적 개입도 할 수 없는 상태를 같은 것으로 본다. 그에게 소위 추방된 자 또는 배제된 자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자이며, 망명자들의 경험을 살펴볼 때 시민권 박탈은 언제든 인간이 아닌 자로 취급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 행위 개념은 한 사회에서 공적 공간으로부터 배제 되어 사적 공간에 유폐되어 있는 자들의 권리 주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다. 여기서 가면은 공적 또는 정치적 정체성을 의미한다. (양창아, 한나 아렌트의 ‘행위’개념-가면과 퍼포먼스의 은유를 중심으로, p.139)

그리고 어진의 투표권 없음에 대한 비판

죄책감이 이끄는 것

연출가로서의 일이 좋다. 무대의 배우를 바라보는 것, 바라보고 정확한 언어로 말해주는 것, 함께 더 괜찮게 만들어 나가는 모든 과정이.

하지만 이게 한편으로 얼마나 게으르고 일방적인 생각인지.

예술에서 생산자와 수용자가 구분되는 것이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것처럼, 연습실에서 연출가와 배우가 구분되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 이 구분은 사실 무대와 연습실에서의 권력관계를 정비하기 위한 편의상의 구분에 불과하다. 마치 처음 만난 (한국)사람들끼리 나이를 물어 재빨리 서열 정비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서열 정비가 된 이후에는 그 ‘편의상’의 구분이 상당한 권력 불평등을 야기한다.

나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을 때에도 지속적으로 내 스스로를 창작자라 여기고 있었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끝까지 예술을 전공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내가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술학교에 진학했다. 신기하게도 입학과 동시에 남들은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법대에 들어가자 마자, 우리 엄마가 나를 ‘이 판사님’이라고 불렀던거랑 비슷했다. 나는 법학을 제대로 공부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형사법이론 수업은 굉장히 재미있어서 거의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들었고, 수업에서 발표도 잘했고, 과제도 잘 내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내 법학 공부의 기억은 형사법 이론 수업, 법여성학 수업이 전부이다. 내 예술학교에서 공부의 기억은 희곡분석 수업, 그리고 몇몇 특강들이 전부이다. 내 몸과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배웠던 것은 베를린에서 미하일 체홉 연극 학교를 다녔을 때다. 언어가 100% 자유롭지 않으니 내 노력과 배움은 더욱 깊었던 것 같다. 아주 갚진 재산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 부질 없는 짓이었지만, 내가 우연히 얻게 된 타이틀을 우려먹고 가끔은 이용하는 나 자신이 참 우스울 때가 많다. 급작스러운 결론이지만 나는 그래서 구분이 싫다. 연출가와 배우를 구분하고,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고, 예술가와 일반인을 구분하고, 여자/남자, 동독 사람/서독 사람, 남과 북, 동성애자와 아닌자, 나이가 많은 자와 적은자,

모든 구분 속에서 내가 권력자의 위치에 있을 때 나는 너무나도 괴롭다. 죄책감이 든다. 그 구분선,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뭐라고 나는 또 나대로 역할놀이를 하고 있을까. 어쩌면 이 구분선을 나는 자꾸 지우고만 싶다. 그게 내 요즘의 화두이다.

2019.9.25 랑시에르 인터뷰 내 맘대로 읽다가,

“과거의 재현 중심 체제 안에서 중요했던 것은 예술의 창작과 예술의 감상 사이의 분리, 예술적 생산물과 그러한 예술에 대한 수용 사이의 분리였다. 내가 생각하는 미학은 또한 이러한 확정적인 분리와 이러한 분리가 만들어낸 예술의 자율성을 문제 삼는다. “

리듬과 습관

매일 깨진다.

매일 리듬이 깨진다.

매일 내가 깨지는 기분이다.

이렇게 만드는 것은 나이다.

아주 불필요한 말과 행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그 불필요 중 오할은 온라인에서이고, 오할은 남을 향해서이다.

나의 몸과 마음이 붕 떠있는 느낌이다.

9시부터 3시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닌, 일을 위한 시간으로 내주었다.

돈벌이에 나섰다. 경제적 안정 뒤에 찾아오는 것은 작업에 대한 깊이 있는 열망이다.

하지만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생긴 돈을 통해 살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는다.

악순환이다. 이 악습이 계속해서 악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다시 깨부순다. 악한 리듬을 깨부수고 다시 나를,

원 나를 향해 간다.

다짐. 또 다짐.

루틴과 패턴

루틴과의 투쟁

: 아침에 일어난다. 커피를 마시고 재빨리 아침을 해결한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면 하루 중 중요한 일의 절반을 해내는 것이다. 학교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걸음에 집중하려고 한다. 계속해서 다른 생각이 밀려온다. 밀어낸다. 밀어내려고 하다가 결국 밀어내지 못하고 전화기에 손이 간다. 보내야할 카톡들, 해야할 전화들. 기어코 머리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빨리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 그렇게 매일의 고요와 나에게 할당된 시간을 덥석 내주고야 만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오로지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이다. 글을 쓰고, 생각을 다듬는다. 그리고는 다시 아이들을 데릴러 간다. 집에 와서 집안일을 한다. 아이들을 재운다. 재우면서 나도 잔다. 자다가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면 피곤하고, 하지 않으면 다음 날 피곤하다.

어떻게 해도 피곤하다.

최적화 된 루틴을 만들기 위해, 매일을 쌓아나간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내가 잘하는 뻗치기, 만나기는 이제 좀 쉬고, 잘못했던 것에 시간을 더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내 더러운 패턴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좋은 루틴들로 방어막을 칠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이 나이다. 나와 대면하는 것. 그 꼴을 보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 열심히 해 내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