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이 이끄는 것

연출가로서의 일이 좋다. 무대의 배우를 바라보는 것, 바라보고 정확한 언어로 말해주는 것, 함께 더 괜찮게 만들어 나가는 모든 과정이.

하지만 이게 한편으로 얼마나 게으르고 일방적인 생각인지.

예술에서 생산자와 수용자가 구분되는 것이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것처럼, 연습실에서 연출가와 배우가 구분되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 이 구분은 사실 무대와 연습실에서의 권력관계를 정비하기 위한 편의상의 구분에 불과하다. 마치 처음 만난 (한국)사람들끼리 나이를 물어 재빨리 서열 정비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서열 정비가 된 이후에는 그 ‘편의상’의 구분이 상당한 권력 불평등을 야기한다.

나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을 때에도 지속적으로 내 스스로를 창작자라 여기고 있었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끝까지 예술을 전공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내가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술학교에 진학했다. 신기하게도 입학과 동시에 남들은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법대에 들어가자 마자, 우리 엄마가 나를 ‘이 판사님’이라고 불렀던거랑 비슷했다. 나는 법학을 제대로 공부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형사법이론 수업은 굉장히 재미있어서 거의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들었고, 수업에서 발표도 잘했고, 과제도 잘 내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내 법학 공부의 기억은 형사법 이론 수업, 법여성학 수업이 전부이다. 내 예술학교에서 공부의 기억은 희곡분석 수업, 그리고 몇몇 특강들이 전부이다. 내 몸과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배웠던 것은 베를린에서 미하일 체홉 연극 학교를 다녔을 때다. 언어가 100% 자유롭지 않으니 내 노력과 배움은 더욱 깊었던 것 같다. 아주 갚진 재산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 부질 없는 짓이었지만, 내가 우연히 얻게 된 타이틀을 우려먹고 가끔은 이용하는 나 자신이 참 우스울 때가 많다. 급작스러운 결론이지만 나는 그래서 구분이 싫다. 연출가와 배우를 구분하고,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고, 예술가와 일반인을 구분하고, 여자/남자, 동독 사람/서독 사람, 남과 북, 동성애자와 아닌자, 나이가 많은 자와 적은자,

모든 구분 속에서 내가 권력자의 위치에 있을 때 나는 너무나도 괴롭다. 죄책감이 든다. 그 구분선,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뭐라고 나는 또 나대로 역할놀이를 하고 있을까. 어쩌면 이 구분선을 나는 자꾸 지우고만 싶다. 그게 내 요즘의 화두이다.

2019.9.25 랑시에르 인터뷰 내 맘대로 읽다가,

“과거의 재현 중심 체제 안에서 중요했던 것은 예술의 창작과 예술의 감상 사이의 분리, 예술적 생산물과 그러한 예술에 대한 수용 사이의 분리였다. 내가 생각하는 미학은 또한 이러한 확정적인 분리와 이러한 분리가 만들어낸 예술의 자율성을 문제 삼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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